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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개월, 3주... 그리고2일> 리뷰 : 통제된 사회에서 선택의 권리를 잃어버린 이들을 위한 이야기

by lucet 2025. 5. 27.

 

 

 

시작하며 : 왜 이 영화를 다루는가?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은 단순히 '불법 낙태'를 소재로 한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독재 정치 아래에서 개인이 얼마나 쉽게 침묵을 강요당하며, 제도 속에 삶이 어떻게 짓밟히는지를 가장 현실적이고 날것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여성의 몸을 둘러싼 통제와 사회적 억압, 인간성의 붕괴를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우정', '책임', '도덕적 결정'이라는 인간 보편의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2020년대에도 낙태권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세계 곳곳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현실 속에서 이 영화는 더욱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1980년대 루마니아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이유, 바로 그 지점을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영화 기본 정보

  • 제목: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 Months, 3 Weeks and 2 Days)
  • 감독: 크리스티안 문쥬 (Cristian Mungiu)
  • 국가: 루마니아
  • 개봉: 2007년
  • 러닝타임: 113분
  • 수상: 2007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 장르: 드라마, 사회 고발

줄거리 요약 : 침묵 속의 하루

1987년 루마니아. 가비타와 오틸리아는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대학생이다. 겉보기엔 평범한 두 청춘이지만, 이들은 친구 가비타의 원치 않는 임신을 해결하기 위해 불법 낙태를 준비하고 있다. 낙태는 국가적으로 금지되어 있어 의료적 지원은커녕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일조차도 범죄가 되는 시대. 이들은 수상한 낙태 시술자인 '벵헬루'와 접촉하고, 여관방을 예약하여 비밀리에 시술을 준비한다.

하지만 시술자는 불법이라는 점을 이용해 두 여성에게 비인간적인 대가를 요구하고, 이 과정에서 오틸리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결정 앞에 놓인다. 영화는 단 하루의 이야기로, 여성의 선택권이 박탈된 사회에서 인간다움이 얼마나 쉽게 부정당할 수 있는지를 절제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본론 1 : 루마니아의 정치적 현실과 영화 속 배경

1.1 차우셰스쿠 정권의 출산 통제 정책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은 인구 증가를 국가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보았고, 1966년 낙태를 전면 금지했다. 피임 기구의 유통도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여성들은 정기적으로 산부인과 검진을 받아야 했다. 이는 여성의 몸이 국가에 귀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영화는 바로 이 억압적 제도를 배경으로 한다.

특히 낙태는 단지 '법적 문제'가 아니라 감시, 처벌, 감금까지 수반하는 공포의 시스템이었다. 영화는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이 말없이 보여주는 불안과 공포, 눈치 보는 시선에서 그 체제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1.2 여성의 삶과 침묵의 일상

오틸리아와 가비타는 법과 사회의 그림자 속에서 철저히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도움도 요청할 수 없는 상황. 이들은 '불법'이라는 이유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조차 보호받지 못한다. 특히, 벵헬루의 협박과 성적 착취 장면은 제도적 공백 속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가 되는지를 명백히 드러낸다.

 

본론 2 : 등장인물로 읽는 이야기의 윤리적 딜레마

2.1 오틸리아 – ‘도덕적 책임’의 무게

오틸리아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다. 그녀는 영화 내내 가장 많은 결정을 내리고, 가장 많은 감정을 억제한다. 그녀는 자신이 낙태를 원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친구를 위해 위험한 거래를 감내하고, 심지어는 성적 수치심을 대가로 지불한다. 이 모습은 관객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2.2 가비타 – 두려움과 무기력의 상징

가비타는 한없이 소극적이다.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시술자를 속이며, 책임을 지는 대신 상황을 방관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히 무책임한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 제도의 그물 속에서 '무력한 피해자'가 된 이들의 얼굴을 대변한다. 수동적인 그녀는 오히려 현실의 더 많은 여성들을 닮아 있다.

 

본론 3 : 이야기 속 철학 – 인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3.1 선택이 없는 선택지

영화에서 가비타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법적으로 불법이고,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히며, 경제적 여유도 없다. 따라서 영화는 '자유로운 선택'의 환상에 대해 묻는다. 정말로 우리는 언제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가?

3.2 침묵의 윤리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는 오틸리아가 남자친구의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방금 친구의 낙태를 도왔고, 충격에 휩싸인 상태지만, 가족들은 그녀의 표정 변화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사회가 개인의 고통에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침묵이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결론 : 지금, 여전히 유효한 질문

4.1 단지 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특정 시대의 사회적 비극을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의 선택권이 정치화되고,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영화는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는 한 개인의 고통을 이야기함으로써, 전체 사회의 무감각을 고발한다.

4.2 오틸리아가 우리에게 묻는 것

오틸리아는 마지막 장면에서 고요한 식당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눈빛에서 묻는다.
"너라면 어땠을까?"
"당신은 지금,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참고자료

  • Cristian Mungiu, 《4 Months, 3 Weeks and 2 Days》, Romania, 2007.
  • BBC News, “The women who risk jail for an abortion”, 2022.
  • Cannes Official, 2007 Palme d'Or 수상 기록.
  • 루마니아 낙태 금지 정책 관련 역사: [Center for Reproductive Rights], 2016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