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 우리는 다음 소희를 막을 수 있을까
"다음 소희"가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
영화 《다음 소희》는 단순한 비극을 그리는 작품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한 소녀의 죽음이라는 슬픈 이야기를 넘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누군가를 몰아세우고, 끝내 외면하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줍니다.
정주리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시스템이 만든 비극’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섬세하고도 단단하게 풀어냅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경쾌하고 활기찹니다. 고등학생 소희(김시은 분)는 학교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미래를 꿈꿉니다.
하지만, 현실은 차갑고 가혹했습니다. 실습생으로 콜센터에 배치된 소희는 곧 모멸과 학대가 일상인 공간에 던져집니다.
목표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눈치를 봐야 하고, 고객의 욕설에도 웃어야 하며, 휴식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
이것이 소희가 맞닥뜨린 ‘어른들의 세계’였습니다.
정주리 감독은 이 과정을 극적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차분한 톤과 담백한 연출로, 오히려 관객이 더 깊은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도록 이끕니다.
그 감정은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어째서 아무도 소희를 구하지 않았을까?"
유진 형사의 시선,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하다
영화는 소희의 죽음 이후, 또 다른 주인공 유진 형사(배두나 분)를 통해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유진은 소희 사건을 수사하면서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죽음임을 직감합니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를 파헤칠수록, 유진은 거대한 무력감에 부딪힙니다.
학교, 교육청, 콜센터, 정부 기관 — 모두가 각자의 책임을 회피합니다.
명백한 가해자는 보이지 않고, 시스템만이 존재합니다.
누구 하나 크게 잘못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현실.
유진은 절망하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진실을 추적하면서, 그녀 역시 변해갑니다.
과거에는 묵묵히 체제를 따르던 경찰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다음 소희'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려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
이 변화는 영화가 던지는 또 하나의 희망입니다.
"가해자가 없는 가해"를 직시하는 용기
《다음 소희》가 가장 뛰어난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특정 인물을 악마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악당'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조금씩 관성에 기대고, 책임을 미루면서, 결국 누군가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보여줍니다.
감독은 이를 "가해자가 없는 가해"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구조적 폭력은, 누구도 악의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동시에, 모두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 결과, 피해자는 철저히 고립되고 침묵 속에서 무너져 내립니다.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분노와 죄책감, 그리고 무력감이 뒤섞여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불편함이야말로 《다음 소희》가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남기는 감정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바로 그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노동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다
《다음 소희》는 특히 ‘현장실습생’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과감히 다룹니다.
영화 속 소희가 경험하는 고통은,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닙니다.
2017년 실제로 있었던 사건 — 전남 여고생 고 이소정 양의 비극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출처: 한겨레신문, 2017년 12월 19일 자 기사)
이러한 현실 기반 덕분에 영화는 더욱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많은 청소년들이 노동 현장에서 열악한 환경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스트레스와 책임.
그리고 어른들의 무관심.
《다음 소희》는 이 참담한 현실을 꾸밈없이 드러냅니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진짜 고통만을 남기는 방식으로.
이런 절제된 표현이야말로 오히려 현실의 비극성을 더욱 또렷하게 부각시킵니다.
작은 변화의 시작, "관심"과 "행동"
영화의 결말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유진 형사는 여전히 거대한 시스템 앞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이 작은 다짐이야말로 영화가 관객에게 요청하는 메시지입니다.
한 명의 관심이, 한 번의 행동이, 어쩌면 ‘다음 소희’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 모두가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작지만 의미 있는 실천을 할 때 비로소 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정주리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거대한 혁명 대신, 조용하지만 강력한 인간적 연대를 제안합니다.
'구조'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태도'를 바꾸는 것은 지금 당장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다음 소희》를 기억하고, 또 다른 소희를 지키자
《다음 소희》는 뼈아픈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김시은 배우는 소희라는 인물을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내어 관객을 울리고,
배두나 배우는 절제된 내면 연기로 형사의 무력함과 분노를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개인을 잊고, 체제를 우선시하는지를 고발합니다.
동시에, 진정한 변화는 거대한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한 사람’을 바라보고 손 내미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줍니다.
《다음 소희》는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할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우리 역시, 다음 소희가 또다시 생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정보 출처
- 영화 《다음 소희》 공식 보도자료 (2023)
- 한겨레신문 기사: "고 이소정 양 사건" (2017.12.19)
- 정주리 감독 인터뷰, 씨네 21 (2023년)
- 영화 리뷰, The Korea Times (2023)